[도서]지그문트 바우만, <유동하는 공포>

                   

“세상은 기만되기를 원한다.” 아도르노의 무뚝뚝한 판결은 포이트방거가 오디세우스와 사람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돼지들에 대해 – 왜냐하면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인간의 조건이 싫었기 때문에 – 슬픈 어조로 비평한 주석을 떠올리게 한다. 또는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의 원형이라 고 할 수 있는, 순수한 이데아의 햇빛을 본 다음에 동료들에게 가기 위해 동굴로 돌아가야 하는 철학자의 슬픈 운명 에 대한 플라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람은 단지 사기에 당하는 것만이 아니다. ... 그들은 기만되기를 바란다. ... 그 들은 안주하는 대상이 없어지는 순간 세상이 너무나 견디기 힘든 것으로 변할 것을 느끼고 있다.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심지어 살아갈 수 없게 하는 메커니즘을 인식시키는 반성의 순간은 반드시 미리 중립화되어 있지 않다. 모순을 드러내는 일은 그 해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에서 그것을 제거하기까지 는 길고 힘든 길이 있으며, 그 첫걸음을 내딛었다고 해서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지 아무런 보장이 없다. 심지어 그 길이 과연 목적지로 통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시작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개별적으로 고통과 집단적으로 생산된 조건 사이의 인과적 관계, 그 복잡한 네트워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 우리는 부르디외의 말을 반복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세계를 연구하는 데 인생을 바칠 기회 를 얻은 사람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 앞에서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