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소비와 연대


기껏해야 타자들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소비 행위를 함께하는 동반자로서만 가치를 가질 뿐이다. 다시 말해 나의 소비에 함께 적극 참여함으로써 소비의 기쁨을 강화시켜 주는 사람으로서만 말이다. 이 과정에서 이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서의 타인들이 가진 타고난 가치(따라서 그처럼 독특한 타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같은 것은 모두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소비 시장이 거둔 승리의 최초의 사상자는 인간적 연대이다.

 

강제력을 유연화해 제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엉망이거나 완수하는 데 실패한 과제는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고안해 어떤 것을 보완하거나 완성하려는 인간의 능력에 맡겨진다. 단조로운 일상의 편안함을 거부당하는 경우 창조성이 기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즉 사유 능력과 반란을 꾀하는 경향(과 용기)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능력 중 어떤 것을 사용하려 해도 리스크가 따른다.

 

코뮤니타스의 생존과 번영은 인간의 상상력과 발명심 그리고 상투적인 일상성을 깨부수고 시도되지 않은 방법들을 시도해보려는 용기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리스크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떠안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 바로 그러한 능력들이 ‘도덕 경제’, 즉 서로 돕고 보살피며, 타자를 위해 살고, 상호 헌신의 조직을 짜내며, 인간들 간의 유대를 단단히 하고 수리하며, 권리를 의무로 해석하고 모두의 운명과 행복에 대한 책임을 함께나누는 것 - 즉 뚫린 구멍을 막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구조화 작업이 방출한 홍수를 막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이런 것들을 지탱해준다. 



자기애


이웃을 사랑하려면 믿음의 도약이 요구된다. 그것은 인간-됨을 탄생시킨 행위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생존 본능에서 도덕(성)으로의 운명적인 이행이기도 하다. 그것은 도덕(성)을 생존의 일부, 아마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 만든 이행이다. 이런 구성요소와 함께 한 인간의 생존은 인간 속의 인간-됨의 생존이 되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생존 본능의 주요 산물이 아닐 것이다 – 또 이웃 사랑의 모델로 꼽히는 자기애 또한 그러한 산물이 아니다. 자기애 –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내 자신 안’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우리, 인간들은 우리와 가까운, 실은 그리 가깝지는 않으며 상당히 먼 사촌인 동물과 생존 본능을 공유한다 – 그렇지만 자기애라고 하는 데서부터 길이 갈라지고 우리는 혼자 남게 된다. 자기애가 ‘삶에 열심이도록 하고’, 좋고 나쁘든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삶을 때 이르게 또는 갑작스럽게 종식시키려고 위협하는 모든 것에 맞서 그것을 물리치고, 그러한 저항이 효과적일 수 있도록 몸을 보호하고 체력과 기력을 강화하도록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점에서 인간의 사촌인 동물들은 우리 인간들 중 가장 열성적이고 기교가 뛰어난 휘트니스 중독자나 헬스 광 못지않게 재주가 많고 노련한 달인이다. 우리의 사촌인 동물들은 생존과 적을 위해 전문 상담가가 필요치 않다. 그들에게는 살아남고 적응하는 것이 바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줄 자기애 또한 필요치 않다.


생존(동물적 생존, 물리적, 육체적 생존)은 자기애 없이도 가능하다. 실제로는 그것이 없는 게 있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생존 본능과 자기애의 길은 평행으로 달리는지도 모른다. 또한 정반대 방향으로 달릴지도 모른다… 자기애는 삶의 지속에 저항할 수도 있다. 자기애는 위험을 불러오고 위협을 반기도록 촉발할 수도 있다. 사랑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따라서 살만한 가치가 없는 삶을 거부하도록 촉구할 수도 있다.


자기애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을 만한 자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고 있는 상태 또는 사랑받으리라는 희망이다. 사랑받을 만한 대상이라는 것, 그렇게 인정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인정의 증거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자기애를 가지려면 사랑받아야 한다. 사랑을 거부하는 것 - 사랑받을 만한 대상이라는 지위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 혐오를 낳는다. 자기애는 타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으로 만들어진다. 만약 자기애를 만들기 위해 대용품이 사용되었다면 아무리 눈속임을 위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그러한 사랑과 흡사한 것이어야 한다. 타인들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야 하고, 그래야 비로소 우리도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다. 어떻게 우리가 사랑받을 만하고, 따라서 자기애를 만끽하고 향유할 권리가 있는지를 알까? 우리는 알며, 안다고 믿으며 누가 말을 걸거나 우리 말을 들을 때 그런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확인한다. 즉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드러내며/알려주는 관심과 함께 우리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줄 때 말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존중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우리가 생각하고, 실행하고 또 하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타인들이 나를 존중한다면 분명히 ‘내 안’에는 오직 나만이 타인들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 –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 이 틀림없다. 그리고 분명히 내가 그것을 주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그런 타인들이 있다 –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나는 중요하고,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쉽게 대체되고 버려지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내가 ‘가져오는 변화’는 나 자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 나의 존재, 내가 하는 일은 중요하다 - 이는 단지 나의 허황된 공상이 아니다. 내 부녕의 세계 속에 무엇이 있든, 만약 내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다른 데로 가버리면 그 세계는 훨씬 더 빈곤해지고 덜 흥미로워지고 전망도 어두워질 것이다. 


만약 그것이 우리를 정당하고 적합한 자기애의 대상으로 만들어 준다면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요구(즉, 자기를 사랑하도록 촉발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이웃들도 사랑받기를 원하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이웃들로 하여금 독특하고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고 간단히 쓰고 버릴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는 존엄성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타인들에게서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고, 확인받았으면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요구는 이웃들도 정말 그러한 가치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도록 재촉한다 – 적어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상호간의 독특성을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 우리가 다르다는 것이 우리가 함께 거주하는 세계를 윤택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훨씬 더 멋지고 유쾌한 장소로 만들어주며, 약속의 보고를 한층 더 풍요롭게 해주는 가치를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