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김영옥,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늙어가는 이들이 변화하는 몸을 단순히 ‘기능들의 저하라는 노화의 관점'에서만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변화하는 몸을 계기로 현재나 심지어 미래가 과거로 되접히는 이야기의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여러 겹으로 덧써지며 동시에 지워진, 기억과 망각의 크고 작은 물결로 생의 시간을 이해하는 문리가 트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 그렇게 올라타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채찍질을 하고, 우리가 해야할 일을 알려주면,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따른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올라타는 이야기.’ 리베카 솔닛이 언급하는 저 ‘이야기'의 속성은 특히 몸이 말을 걸어올 때 두드러진다. 조금은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치매’ 노인들의 배회에서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타는’ 순간을 목격한다. 그들의 배회에는 나름의 정향성이 있으며, 그 배회야말로 몸이 이야기가 되어 그들을 올라타는 순간을 표현한다.


도시에서나 여행지에서 ‘길을 잃기'는 가장 매력적인 걷기 형태로 언급 되기도 하지만, 치매 환자의 길 잃기는 묘미도 매력도 아닌 ‘위험한 배회'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배회'에도 방향과 목적과 의미가 있다. 이들을 이끄는 것은 소망과 그에 따른 기억 작업이다. 소망과 기억 작업은 규범적 일상의 규칙과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그동안 살아낸 시간과 장소의 품 안에 있다. 이들의 ‘배회'는 몸과 마음, 신경 지도 간의 연결이 끊어지거나 뒤죽박죽이 되어 발생하는 오작동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도) 작동하는 ‘자기’의 표현이다. 이들의 배회가 위험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의 환경이 마련된다면 이 배회도 얼마든지 매력적이고 미묘한 ‘길 잃기'가 될 수 있다. 파국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일어서서 걸어 나가는 몸의 주체성. 치매 환자들의 위험한 놀이가 가능할 수 있는 삶의 환경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고 해도, 그래서 현실 속에서는 금지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이 주체성 자체는 부인될 수 없다.


‘위험한 놀이'가 최소한도라도 가능한, ‘위험하지 않은’ 지리적 환경을 당장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계속해서, ‘조금 덜 위험한'의 ‘덜’ 부분을 늘려 가면서 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것은 어떤가. 


‘배회의 위험'이 염려되어 요양원에 모셔진 노인들은 사면이 벽으로 둘러쳐진 요양원 안에서도 배회를 한다. 더는 걸을 수 없어 휠체어에 탄 상태에서도 배회는 이어진다. 잠가놓은 휠체어를 팔 힘으로 몰고 다니며 선풍기를 쓰러뜨린다. 에어컨이 가동되는 문을 닫아버린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배회하는 어르신이 있다. 일반인도 잠긴 휠체어를 밀기 쉽지 않은데 얼마나 팔이 아플까. 또 선풍기에 손이라도 다치시면 어쩌나 싶어서 휠체어를 못 움직이게 잠그고 붙잡고 있는 내게 요양보호사님이 말했다. “못 움직이게 하는 것도 학대에 속하는 거에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두고 보호하는 게 우리들의 일이죠"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위험에서 보호하기'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보호하는 방식에 대해 더 고민하고 더 상상력을 발휘하자고, 이미 조금씩 타인의 도움이 필요해진 나는 위험한 배회를 할 수도 있는, 하고 있는 미래의 나를 위해, 미래의 내 자리에서 지금의 내게 제안한다. 


흰머리 휘날리며 배회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 모든 사람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반드시 맞이하게 될 ‘늙은 자기'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연대가 필요하다. 젊은이들부터 ‘중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이 연대의 띠는 길면 길수록 사회문화적, 정치적 힘을 지닐 것이다. 노년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자본주의를 넘어, (신)가족 중심주의를 넘어, 이동통신 테크놀로지 신앙을 넘어,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흐르고 펼쳐질 때, 연대의 힘은 규범적 당위성의 껍질을 벗고 ‘안전하고 아름다운' 구체적 현실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역설적이게도 축복이나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과 과제로 다가온다. 개인이나 사회, 국가 모두 이 힘겨운 과제 앞에서 당황하고 있다. 생각으로는 느낌으로는 ‘100년 삶'이라는 것과 아직 친숙해지지 않았는데 생명과학이나 의료기술이 저 혼자 앞서간 것이기도 하고, 또한 100세 수명이 모두의 구체적 현실이 되기 전에 두려움이 모두의 뒷덜미를 낚아채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